종교적 체험 이야기는 자세히 하면, 시험들 것 같아서, 우리들 주변 이야기에서 실례를 찾아보았습니다. 물론 기분 엄청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서서히 신약성서의 성삼위 언어를 포용하게 될 것으로 희망해 봅니다. 다음에는 여호와 예수의 관계라는 무지 위험한 질문을 다룹니다. 질문은 jesusacademy@gmail.com 로 주세요.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키엘케골도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상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현장신학] 긴급 질문-기독교 3대 스캔들 없이 가능한 믿음의 길?
질문 고맙습니다. 동정녀 탄생, 십자가 죽음, 부활 사건 없이 믿음이 가능할까요?
질문은 jesusacademy@gmail.com
[현장신학] 문답교실35-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있나요?
정직한 사람들일수록 자주 양심의 아픔을 느낀다. 그 아픔은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가톨릭의 고해성서, 무당의 굿, 그리고 정신과 중독치료라는 길이 있긴 하다. 그 모든 방책에도 아직 존심의 상처를 앓고 있다면, 갈릴리 사람, 예수에게로 오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질문은 jesusacademy@gmail.com
[현장신학] 문답교실32, 33, 34-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요?
신 존재를 묻는다. 현실의 신앙인이. 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와닿은 이야기를 출발해 본다. 극소수의 신학자들이 몸부림치고 있는 질문이다. 목회 현장에서도 도움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견해이다. 오늘 가족끼리 심하게 다투었나요? 그것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 안에 있다고 감히 말합니다. 그 속사연을 오늘 나눕니다. 바울의 연약한 하나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답이 있습니다. 질문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다룰 질문은 죄책감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입니다. 질문은 jesusacademy@gmail.com
[현장신학] 문답교실31-지옥, 신은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많이 망설였지만 결국 털어놓게 됩니다. 성경 이야기는 참말로 적나라한 이야기입니다. 연옥은 다루지 아니하였습니다. 신기한 점은 성서는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낸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왜 그 사실을 부정할까요? 참 궁금해요. 다른 민족들의 신은 사람이 만든 거고, 자기들 신은 하늘에서 뚝! 말이 되나요? 그런데 알고보면 그들도 필요하면 신들을 만들거나, 다른 민족들의 신을 수입해 온다는 기록을 봅니다. 저는 예수의 아버지(어머니) 신을 믿을 뿐, 다른 신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30-신 없는 기독교? 상아탑 학자들 말, 풀어보면 이렇다.
조직신학은 3가지 질문을 한다 했다. 일관성, 상관성, 열매. 오늘은 상관성과 열매를 생각해 본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9-지옥이 겁나요? 공포정치에 놀아나지 마세요.
일관성이라는 질문 앞에서면 지옥 이야기의 무게는 사라지고 만다.
[현장신학] 문답교실 업데이트 26, 27,28
질문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잘못할 때마다 죄책감이 자동으로 드는데 그 죄책감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
- 부모가 없었던 사람이나 부모가 있되 저주스런 부모를 가졌던 사람들이, 자기 부모님 같지 않은 너그럽고 품에 안아주는 하나님 아버지 또는 하나님 어머니가 있어서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나요?
- 예수는 신이라서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놓으라고 했는데 … 그는 할 수 있지만 우린 신이 아니니 예수처럼 살기 싫은데 그럼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본받아서 살아야 하는가?
-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준 은혜가 커서 남도 쉽게 용서해 줄 수 있었는데 십자가를 빼면 남을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가슴을 치며 그를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로 매달린 탓인지, 어느새 무덤덤해졌고 더 이상 이 전같지 않게 되었죠.
- 집안 제사 때 나만 어정쩡하게 있는 게 싫은데 어찌해야 하나요? 마음도 불편합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5-기독교인 조직신학자가 유대인 창세기를 읽다.
구독자의 생생한 질문을 함께 고민하다 보니, 지금의 기독교 신학에 엉망이라는 걸 자꾸 느낌으로 알게 되어,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고마운 건 다시 배움의 기회이기 때문이고, 부끄러운 것은 덜익은 과일을 맛있다고 우겨댄 지난 날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도 다르지만, 안식일을 법으로 선포한 출애굽기에는 안식일이 창조와 상관이 없답니다. 그 심각한 다양성들을 저는 그때그때 저마다의 상황에서 생명 살리고 돌보기 공사판 이야기라고 읽습니다. 질문을 주시면 저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4–창세기, 이렇게 읽으면 더 크게 은혜된다.
창세기는 한국인 이야기도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쓴 책도 아니다. 즉 상당한 주의가 필요한 먼 나라, 옛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감동이 크다. 2500여년 전에 이솝이 썼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처럼. 물론 그 이상이지만. 질문, 감사 드립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3–창세기 읽기, 준비운동_고장났다.
인공지능 시대에, 한국인이 남의 나라, 남의 종교 문서, 창세기를 읽는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준비운동을 아주 조금 해 본다. 질문 주신 분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2 – 한국인들이라면 창세기를 이렇게 읽어라.
질문자분들 덕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배움의 즐거움 기회를 주신 구독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1 –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겁내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사람의 죽음만이, 유일하게, 형벌이라는 괴망칙한 고집, 이제 털어버릴 때다.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현장신학> 문답교실20 – 무슨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인가요?
유대인들은 아는데, 왜 기독교인들은 모를까? 모세의 하나님 시간이 지나고, 예수와 바울의 하나님 시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도망갔다 하네요.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먹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아, 답답. 감사합니다 질문. 다음 시간에는 창조신앙.
<현장신학> 문답교실19 – 하나님, 왜 나만 미워해요?
아픈 성도의 질문을 받고, 오래 기도했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만날 좋은 기회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앞서간 이들의 진짜 기도를 첨부한다. 위안을 받을까 해서.
1.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은총을 베푸소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소서.
바꾸어야 할 것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지혜를 주옵소서.
2. 감사를 올리는 패잔병, 남군병사의 기도
저는 힘을 구했습니다. 뭔가를 성취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약하게 하셨습니다.
복종하는 겸손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건강을 구했습니다. 더 큰 일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연약하게 하셨습니다.
더 좋은 일을 하게 함이었습니다.
부요를 구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빈곤을 주셨습니다.
현명해지게 함이었습니다.
권세를 구했습니다. 사람들의 칭송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힘없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필요를 느끼게 함이었습니다.
온갖 것들을 구했습니다. 인생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생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즐기게 함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구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희망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은 저의 기도들이 거의 모두 응답받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넉넉하게 복 받은 자입니다.
아멘.